'Band Information/N · O · P · Q · R · S'에 해당되는 글 51

  1. 2008/12/20 Punk77 Pretty Things
  2. 2008/12/20 Punk77 NICO
  3. 2008/02/12 Punk77 RASPBERRIES
  4. 2007/05/12 Punk77 THE SEX PISTOLS
  5. 2007/05/12 Punk77 ONE WAY SYSTEM
  6. 2007/05/10 Punk77 THE POGUES
  7. 2007/05/10 Punk77 PETER & THE TEST TUBE BABIES
  8. 2007/05/10 Punk77 NEEDLES AND PINS
  9. 2007/05/09 Punk77 ONLY ONES
  10. 2007/05/08 Punk77 PRETEN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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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결성되어, 사이키델릭한 음악에서 프로그레시브한 음악까지 다양한 음악을 했다. 영국 출신 그룹 중에서 프리티 씽스만큼 미국에 알려지지 않은 밴드는 없을 것이다.

믹 재거와 비슷한 스타일의 필 메이와 기타리스트 딕 테일러는 1960년대 중반에 초기 롤링 스톤즈 사운드의 원판을 보여주었고, 그들의 두 음반은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다. “Don't Bring Me Down”과 “Honey I Need”를 크게 히트시키기는 했지만 미국 시장에는 알려지지 못했다. “Don't Bring Me Down”은 데이빗 보위의 <Pin Ups>를 통해 알려졌다(이 음반에 그들의 또 다른 곡인 “Rosalyn”이 있다).
1967년이 되어 그들은 보 디들리 스타일보다는 핑크 플로이드 등의 스타일로 변신해 1968년에 락 오페라 <S. F. Sorrow>를 냈다. 이 음반은 피터 타운쉔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락 오페라 <타미>를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연주 활동들을 소극적으로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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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0 21:08 2008/12/2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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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는 1960년대 전설적인 아티스트들과 낭만적으로 사귀고, 공동 작업을 한 매력적인 아티스트다.

그녀의 첫 경력은 유럽에서의 슈퍼모델로 시작한다. 1965년에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라 돌체 비타>에 출연하고 알랑 드롱의 아들을 낳는다. 그녀는 롤링 스톤즈의 매니저인 앤드류 룩 올드함의 눈에 들어 첫 레코딩을 하게 되는데 서포트 뮤지션으로는 롤링 스톤즈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존스와 나중에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지미 페이지가 들어간다.
이후 그녀는 뉴욕으로 옮겨 앤디 워홀에 의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1967년 데뷔 음반에 리드 싱어로 3곡을 취입한다. 그러나 밴드는 정규 멤버로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녀는 밴드를 나와 잭스 브라운과 루 리드, 존 케일의 어시스트로 음반 <Chelsea>를 낸다.

1969년에는 케일의 프로듀서로 암울한 고딕적 분위기의 <The Marble Index>를 발매하였고, 1970년에는 브라이언 이노와 필 만자네라 등의 아트 락 아티스트의 지원을 받아 음악 활동을 계속 해나간다. 그러나 마약과 난잡한 생활 등에 의해서 계속 망가지면서 라이브 음반들과 촬영 등은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원조 고딕 라커로 날이 갈수록 그녀의 영향은 강해져 간다.

밥 딜런, 잭슨 브라운, 벨벳 언더그라운드, 롤링 스톤즈, 짐 모리슨, 이기 팝 등과의 환상적인 스토리는 그녀의 전기인 <Nico: The Life & Lies of an Icon, by Richard Witts>와 <The End, by James Young>을 통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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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0 18:10 2008/12/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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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싱어 송 라이터인 Eric Carmen을 주축으로 클리브랜드에서 결성되었다.

당시 클리브랜드의 하드록 씬에 반박하여 그들은 브리티시 인베이션 시기의 음악을 했다. 짧은 머리와 그에 어울리는 복장들과 비틀즈풍의 음악을 하였다. 캐피탈 레코드의 눈에 띄어 “Don’t Want to Say Goodbye”로 데뷔를 한 뒤 후 스타일의 기타와 비치 보이스풍의 하모니가 잘 믹스된 “Go All the Way”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후 몇 곡의 히트를 내다 쇠퇴해져 1975년에 해산하고 Eric Carmen은 솔로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테마를 가져와 만든 “All by Myself”로 엄청난 성공을 한다. 그리고 영화 <Dirty Dancing>의 사운드트랙 음반에 있는 “Hungry Eyes”, “Make Me Lose Control” 등도 10위권 안에 들었다.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록 음악과는 분명히 다르고 일반 팝보다는 사운드가 강한 파워 팝의 대표적인 밴드라고 중론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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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2 12:06 2008/02/1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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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여름, Malcolm McLauren의 진두지휘아래 출발했다.
그룹은 잠시동안 밴드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Wally Nightingale을 리드 보컬리스트로 맞아 Swanker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 Sex Pistols로 개명하면서 Johnny Rotten(vocals), Steve Jones(guitar), Paul Cook(drums), Glen Matlock(bass)의 안정된 라인업을 유지했다.
 
1976년, 런던을 중심으로 부정기적인 연주활동을 갖는데 Malcolm McLaren이 상업적으로 잘 포장한 헤어스타일, 찢어진 티셔츠, 안전핀 등의 펑크패션은 금새 10대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밴드의 공연은 항상 폭동이 끊이질 않았는데 100 Club Punk Rock Festival에서 Damned의 공연중 시드 비셔스가 날린 맥주병이 깨지며 한 소녀가 눈이 머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정점에 달한다.(실제로 그런 사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사실이 불분명하다. 또 하나의 시드 신화라는 얘기도 있다.)

밴드는 곧 EMI와 계약하고 "Anarchy In The UK"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한편 Sex Pistols는 런던의 주말 TV연예 프로그램인《Today》에 출연해 네개의 철자로 된 말들을 마구 내뱉는데 이 사건은 다음날 런던의 신문 헤드라인으로 일제히 기사화 된다.(섹스 피스톨즈 TV에서 'FUCK'이라고 하다!)
이로 인해 그룹의 'Anarchy' 투어는 가느 곳마다 취소되기 일쑤였고, 레코드 판매상들은 그들의 앨범 판매를 거부했다. "Anarchy In The UK"는 차트 38위를 기록했으나 오래지 않아 EMI와의 계약을 해지당한다. 1977년, Matlock이 Sid Vicious로 교체되면서 다음달 버킹검 궁전 앞에서 A&M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1주일 후 A&M은 계약을 취소하고 Malcolm은 단 1주일만에 계약금 40,000파운드를 챙긴다.
이후 당시에는 소규모 레이블이었던 Virgin과 계약을 맺고 "God Save The Queen"을 여왕의 즉위 25년 기념일인 Queen's Jubilee에 발표한다. 라디오 주간 방송들은 일제히 이 곡을 방송금지 시켰지만 NME차트 1위를 기록하고 Johnny Rotten과 그룹 멤버들은 길거리에서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세번째 싱글 'Pretty Vacant'(Glen Matlock의 작품인)는 금새 Top10에 진입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Holiday In The Sun"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두가 기다리던 데뷔앨범《Never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가 발매된다.

이후 실패 투성이의 미국 투어와 함께 다큐멘터리 필름의 제작에 들어가는데 멤버들의 관계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1978년 Rotten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룹을 떠나겠다고 발표한다. 당시 매니저인 Malcolm은 그는 해고 당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한편 Malcolm은 브라질로 이동해 전직 열차 강도였던 Ronnie Biggs와 필름 제작을 계속한다. Sid는 헤로인 중독 문제로 이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Jones와 Cook만이 작업에 참여했다. Malcolm은 Ronnie Biggs를 밴드의 보컬리스트로 싱글 "God Save The Pistols"를 녹음하는데 후에 'No One Is Innocent(A Punk Prayer)'로 제목이 바뀐다. b-side에는 Frank Sinatra의 고전을 커버한 Sid Vicious의 "My Way"를 수록한다.

Malcolm의 필름은 감독 Jullien Temple에 의해《The Great Rock'n' Roll Swindl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필름이 완성되면서 Sid는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 Eddie Cochran의 커버인 "C'mon Everybody"를 녹음한다. 1978년 10월 12일에는 Sid의 여자친구 Nancy Spungen이 첼시 호텔에서 칼에 찔린채 죽어 있었고, Sid는 살인 혐의로 체포된다. Sid는 보석으로 풀려나 있던 동안 헤로인과다 복용으로 고생하다 1979년 2월 2일 아침 시체로 발견된다.

Virgin Records는 이후《Flooging Dead Horse》(헛수고하기)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타이틀로 앨범을 발매하고 1986년 Johnny Rotten은 전 멤버들과 매니저였던 Malcolm과의 법정 소송에서 승리해 잃어버린 이름과 명예를 되찾으며 Sex Pistols와 완전히 결별했다.

차대선 (2004-07-21 02:07:50)
섹스피스톨즈..너무좋다.

조이라이더 (2004-12-05 23:13:49)
aituk

이지혜 (2005-01-01 00:09:38)
시드가 베이스를 잘치는 줄 알았다.//////

박인화 (2005-05-07 08:49:43)
섹스 피스톨즈의 진가는 그들의 연주 실력이 아니라 엿 같은 시대 상황에 온몸으로 저항한 그 정신이다. 그들의 저항 정신은 수많은 후배 락밴드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그리고 아직도 그 정신은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김정운 (2006-05-31 17:11:36)
시드잘치진않지만 센스잇다 ㅋ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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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2 19:40 2007/05/1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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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잉글랜드의 북서부 지방의 해안마을인 Fleetwood에서 5명의 젊은이들로 처음 결성된 One Way System은 1981년에 "Jerusalem"의 데모곡으로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하면서 No Future 레코드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곧이어 블랙풀의 자주레코드사인 Beat The System Records를 통해 EP를 발표하고 들쑥날쑥했던 밴드멤버들을 Gavin Whyte(vocals), Dave Ross(guitar), Gaz Buckley(bass), Tom Couch(drums)의 네명으로 안정시킨다.
1983년에는 Cherry Red의 산하 레이블인 Anagram Records와 계약을 맺고 발표한 싱글 "Give Us A Future"가 인디펜던트 차트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Sounds지의 커버에 자신들의 모습과 함께 첫앨범 의 발매소식이 실리기도 했다.
이어 계속해서 이어진 공연활동에서는 GBH, The Exploited, Peter & The Test Tube Babies같은 유명 밴드들과 함께 헤드라이너로 나란히 나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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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2 04:10 2007/05/12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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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 London punk scene에 등장한 Pogues는 처음에는 Pogue Mahon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영어로 번역하면 Kiss My Arse로 풀이된다고 한다). 이들은 아일랜드의 전통음악을 펑크버젼으로 편곡해 런던시내의 펍등에서 연주하곤 했다.

10대 펑크밴드인 "The Nips"에 있었던 밴드의 프론트맨 Shane McGowan (vocal)을 중심으로 Peter 'Spider' Stacy (tin whistle), Jem Finder (banjo/madolin), James Fearnley(guitar/piano accordion), Cait O'Riordan (bass), Andrew Ranken (drums)의 대식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Clash의 무대에 오프닝 밴드로 출발한 밴드는 폭동에 가까운 라이브쇼와 무대 위에서의 잦은 싸움, Stacy의 맥주통을 머리로 들이받는 등의 예측할 수없는 행동들 때문에 레코드 회사들로부터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84년에 가서야 가까스로 Stiff Records와 계약을 맺은 후 데뷰앨범인《Red Roses For Me》를 발표한다. Elvis Costello가 프로듀스한《Rum, Sodomy And The Lash》를 발표하면서 Finer가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그룹을 떠나고 전 Radiators From Space의 기타리스트였던 Philip Chevron이 가입한다. 그룹은 강력하고 개성있는 라이브와 함께 상업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으며 UK Top 20에 진입한다. 그룹내에서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전 Steeleye Span의 창단멤버였던 멀티 연주자 Terry Woods가 새로운 멤버로 가입하고 Cait O'Riordan이 Darryl Hunt로 교체된다. 그녀는 후에 Elvis Costello와 결혼하기도 한다.

밴드의 정치적 행동은 싱글 "A Pair Of Brown Eyes"와 함께 발매된 비디오 클립을 재편집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는데, 비디오 클립의 내용중, 당시 수상인 마거릿 대처의 포스터에 침을 뱉는 내용 때문이었다.《If I Should Fall From Grace With God》은 Steve Lillywhite에 의해서 프로듀스됐는데 중동과 스페인 고전음악의 요소들을 수용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 20만장 이상 판매됐고, 앨범 중 Lilywhite의 부인인 Kirsty MacColl과 MacGowan이 듀엣으로 부른, 신랄한 비판이 돋보이는 싱글 "Fairytale Of New York"은 1987년 크리스마스에 UK차트 2위까지 기록한다.

1989년 가을에는 MacGowan의 지나친 음주습관으로 인해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이 잦아졌고, 그룹의 미래는 불안하게만 보여졌다. Bob Dylan과의 대규모 미국투어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던 MacGowan은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맥없이 쓰러지고, 밴드는 MacGowan 없이 공연을 치룬다. Chevron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다른 밴드들 같았으면 '그자식을 쫒아내 버리자.' 혹은 '해산하자.'라고 했겠지만 우리는 그런 밴드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들이 좋아하건 아니건 간에 모두들 서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Peace And Love》앨범에서는 거의 모든 멤버들이 곡쓰기에 참여했고, 이런 취향은 Hurdy-Gurdy(현악기의 일종.), Cittern(16~17세기에 유행하던 기타 비슷한 악기.), Mandolin등 다양한 악기의 사용으로 표현됐지만, 초창기 folk-punk사운드를 좋아하던 골수팬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훌륭한 연주실력과, MacGowan의 탁월한 작곡능력은 계속해서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갔지만, 예상치 못한 음주습관은 초창기의 왕성했던 창작력을 점점 무디게 만들었다. 1989년 한 인터뷰에서 MacGowan은 14살 이후로 완전히 술에 깨 있던 적(dead-straight sober)은 없었다고 고백했으며, '술을 마시면 천국같은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1년 결국 MacGowan은 그룹을 떠나고, Clash의 보컬리스트인 Joe Strummer가 임시로 가입한다. 다음해 6월까지 밴드는 계속 활동했고, Joe Strummer는 그룹 Spider Stacy에 가담하기 위해 그룹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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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22:28 2007/05/1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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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 The Test Tube Babies는 영국내에서도 펑크록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가 없었던 소도시 Brighton 출신이다.

80년대초 젊은 펑크들에게 사랑받았던 oi-movement 에 영향을 받은 밴드는 Chris Marchant, Nicholas Loizides, Peter Bywaters, Derek Greening등 4명으로 처음 결성됐는데, 1978년 Attrix 레이블에서 발매한《Vaultage 1978》이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Elivis Is Dead"라는 곡으로 참가하면서 데뷔한다.
 
1982년까지 Peter & The Test Tube Babies의 싱글들은 No Future 레이블을 통해서 발매되는데 "Banned From The Pub", "Run Like Hell"등이 이때의 대표곡들이다. 1983년에는 자신들의 레이블인 Trapper에서 "Zombie Creeping Flesh", "The Jinx" 등의 싱글들을 발표하다가 드디어 데뷔앨범《The Maiting Sounds Of South American Frogs》를 발표한다.
한달후에는 두번째 앨범《Pissed And Proud》를 발표하고 이후 2년간 자신들의 레이블인 Hairy Pie를 포함한 여러 레이블에서 여러장의 앨범과 싱글을 발표한다. 카세트 테입으로만 발매된 앨범《Journey to the Centre of Johnny Clarkes Head》 이후 1986년《Soberphobia》까지 계속해서 앨범발매는 이어지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고 밴드의 이름도 서서히 잊혀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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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13:19 2007/05/1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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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bers:
Page Porrazzo, Denny Ward, Larry Whitman, Dennis Clark, Dino Porrazzo

버뱅크 출신의 Needles & Pins는 특이하게 60년대 걸/팝그룹인 Ronnettes나 Turtles의 곡을 커버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밴드의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1964년으로 대표되는 브리티시 인베이젼에 그 뿌리를 두면서 60년대의 다른 아메리칸 밴드들인 Turltles, Lovin' Spoonful의 음악적인 요소들을 흡수한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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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13:08 2007/05/1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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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Peter Perret (vocals/guitar), John Perry (guitar), Alan Mair (bass), Mike Killie (drums)의 멤버들로 결성되었다. 음악적으로 뉴웨이브로 분류되긴 했지만 멤버들 각자는 오랜 연주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Alan Mair는 Beatstalkers라는 밴드에 있었고, Mike Killie는 유명한 Spooky Tooth의 멤버였으며, Peter Frampton, Balls등과 일한 경력이 있었다.

"Lovers Of Today"라는 희망적인 싱글을 발표한 후 CBS와 레코드 계약을 맺는다. Lou Reed를 연상시키는 표범무늬 가죽재킷의 프론트맨 Peter Perret를 중심으로 내세운 밴드는 히트싱글 "Another Girl, Another Planet"를 수록한 데뷔앨범《The Only Ones》를 발표한다. 자신들이 직접 프로듀스한 두번째 앨범《Even Serpents Shine》역시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나 음악적 방향의 차이로 레코드사와 마찰을 빚기 시작한다.
Colin Thurston이 프로듀스한 세번째 앨범《Baby's Got A Gun》에서는 Pauline Murrays를 초청하기도 하나 초기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 레코드 판매량이 현저히 떨어지자 CBS는 계약을 해지하고 1981년 그룹은 해산을 한다.

해산 후, 여러 매체를 통해 Peter Perret과 Only Ones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Peter Perret은 오랜 약물중독에서 벗어나 91년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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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9 17:51 2007/05/0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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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헤리퍼드 출신인 3명의 미국 젊은이와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여성 리드싱어 크리시 하인드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뉴웨이브 밴드를 결성해 많은 활동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리지널 멤버중 두명이 약물복용으로 82년과 83년에 사망하면서 시련을 겪기도 하였는데 크리시 하인드는 잔여 멤버인 마틴 챔버스와 함께 새로운 4인조 그룹을 결성한다.

크리시 하인드는 80년대 가장 인상적인 여성 보컬리스트이자 작곡자인 밴드의 핵심인물 이었는데 밴드 결성 이전 고향인 오하이오의 아크론에서 60년대 후반 뛰어난 연주실력과 작곡실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크리시는 60년대와 70년대 록과 소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틴에이저를 전후한 15년간 방대한 양의 음악을 듣는데 소비했으며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항상 곁에 끼고 사는 소녀였다. 1984년에 가진 Musician과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밝힌 그녀의 음악적 성장배경은 다음과 같다.

"나는 Sam The Sham &The Paraohs를 공연에서 보았으며 Jackie Wilson과 Yardbirds, 그리고 Rolling Stones의 스테이지를 보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또 Dennis Wilson (Beach Boys)이 공중으로 드럼스틱을 던지거나 한바탕 소동을 벌이며 등장하는 모습은 싫증나도록 보았으며 Mitch Ryder와 Detroit Wheels가 무대 위에서 주먹다짐을 하는것을 보았다.그러나 14살이 될 무렵 주먹다짐이나 싸움 등이 연출된 것을 안 뒤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어떻게 그런 모습에서 좋은 영향을 받을수 있겠는가?"

크리시는 십대에 접어들면서 좋아하는 보컬 스타일을 익히며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 시절에 대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노래를 잘 할수 있는지 알고 싶지 않는가? 내가 클리브랜드에서 처음 노래하기 시작했을때는 모든 작업이 끝난 후의 어느 한 작은 방에서 폐가 견딜수 있는 극한까지 소리높여 부르곤 했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청중으로 의자에 앉아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마음속으로 상상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발전이 없다는 얘기다. 가장 어려운 일중 하나가 자신이 갖고 있는 단점을 강점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스스로 채찍질해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작은 턱을 가지고 있는 여성 싱어가 커다랗고 모진 턱을 갖은 사람을 부러워 하듯이 말이다. 당신이 갖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최고가 됐을 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일들은 잊고 잘할수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크리시는 기타를 배우기도 했는데 고향인 아크론에서는 더이상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뒤 20대 초반에 록의 본고장인 영국 런던으로 간다. 73년 자신 스스로 인생에 모험을 걸만한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 후 런던으로 돌아온 크리시는 파트 타임 연주자나 웨이트레스 그리고 New Musical Express에 글을 쓰면서 몇년을 보낸다.
이 시기에 그녀는 Sex Pistols, Clash, Damned등 유능하고 졺은 그룹 멤버들과 친하게 지낸다. 결국 후에 Pretenders를 결성하게 되는 멤버인 James Honeymmon-Scott과 베이시스트인 Pete Farndon을 알게 된다.
78년 봄 크리시 하인드를 주축으로 두명의 멤버가 모여 Chrissie Hynde And Pretenders를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곧 Read Records와 계약하게 되고 매니저로 레코드사 사장인 데이브 힐을 맞아들인다. 데뷔싱글 "Stop Your Sobbing"을 잘 알려진 Nick Lowe의 프로듀스로 내놓았는데 이곡이 영국차트 40위안에 들면서 짧은 시간에 확실한 이정표를 세운다.
밴드 내에 정식 드러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 Martin Chambers를 네번째 멤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Martin은 드럼스틱을 사기 위해 악기점에 들렀다가 제임스를 만나면서 친분을 갖게 된 뮤지션이다.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한 이때 제임스는 약물에 빠져 이후 밴드에 치명적인 충격을 안겨 준다. 78년 라인업이 완성된 후 영국 전역을 돌며 다이나믹한 콘서트를 벌인다. 이때 발표된 싱글 "Kid"는 베스트 셀러가 됐으며 "Brass In Pocket"은 차트 1위를 기록한다. 두 싱글은 80년대에 발표된 데뷔엘범《Pretenders>에 수록되어 Read Records에서 발매되었으며 미국에서는 Sire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됐다. 《Pretenders》는 새로운 록의 사조로 평가 받으며 이후 10년간을 자신들의 해로 만든다. 미국의 유력한 음악지 Rolling Stone은 이들의 데뷔앨범을 록계에 길이 기억될만한 뛰어난 데뷔앨범이라 평하였다.
모타운 사운드를 보여주는 "Brass In Pocket"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Mystery Achievement",그리고 사랑스러운 "Stop Your Sobbing"등 앨범 전체적으로 끝없는 즐거움을 준다."
이 당시까지 여성이 록그룹의 전면에 나온다는 것을 생소하게 여기고 있던 때였고, 크리시 자신도 이런 음악 풍토에 의아해 하고 있었지만 Pretenders는 엄연한 그룹이었으며 크리시 하인드를 전면에 내세우는 홍보전략을 내세웠을 뿐이지 그녀를 위한 백밴드는 아니었다.

어쨌든 앨범《Pretenders》는 영국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미국에서는 골드 레코드를 기록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전역을 돌며 벌인 콘서트에서 개성있는 연주를 들려주며 관중들의 환호를 얻어냈다. 4월에는 또다른 히트싱글 "Talk Of The Town"을 영국과 미국에서 발매하였으며 같은해 11월에는 2집 녹음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움직였고 다음해인 81년 8월에《Pretenders II》를 발표한다. 이 앨범에는 영국차트 10위를 기록한 감각적인 발라드 "I Go To Sleep"이 들어 있다.

월드투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때 이미 이들에게는 불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6월 14일에 피트 판든이 탈퇴의사를 밝혔으며 이틀 뒤인 16일에는 제임스 허니문 스코트가 약물과용으로 사망하게 된것이다. 피트 판든은 크리시 하인드와 연인의 관계를 맺고 있다가 나중에는 밴드내의 주도권 문제로 트러블을 일으키게 된다.83년 11월에 가진 New Musical Express와 가진 인터뷰에서 크리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피터와 나는 밴드를 출범시킬때 매우 가까웠다. 내가 말하는 뜻은 남녀간에 사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의 길을 가게된 이후로 우리는 더이상 상대방의 얼굴을 볼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후 같이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비교적 잘해왔으며 밴드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문제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모두 합산해 한마디로 얘기해 보라면 아는 '헤로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당시 피트는 약물을 습관적으로 복용하고 있었으며 약물 없이는 연주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무대위에서 연주를 해야만 했으며 위태위태했지만 그런대로 다른 멤버들과 호흡을 맞출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약물에 점점 더 빠져들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약물에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이후에는 제대로 연주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것이 지미를 화나게 했다. 어떤 형태로 지미에게 영향이 왔는지 말할수는 없다. 여덟달간의 투어로 우리는 극도로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모두가 예민해 있었으며 마틴이 여덟개의 전등을 주먹으로 쳐서 잡혀있던 투어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마틴은 평소에 밴드에서 중재역할을 하고 있던 멤버였는데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보면 그때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짐작할 수 잇을 것이다. 허니문 스콧이 약물에 빠져 있을때 판든처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실 죽기전에 제임스는 그의 친구이자 기타리스트인 Robbie McIntosh를 불러 연주하는 모습을 보게 했다. 제임스는 밴드의 공연에서 트윈 기타 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로비 또한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제임스의 자리를 로비 맥킨토시가 메꾸게 된다. 로비는 Foster Brothers, Chris Tompson, Island And Night와 작업한 경험이 있는 전천후 기타리스트였다. 그와 활동했던 Island And Night는 "Hot Summer Night"라는 곡으로 차트 20위에 오르기도 했다. 크리시와 마틴은 그룹을 재결성하기 전에 게스트 아티스트로 Billy Bremmer와 베이스에 Tony Butler를 받아들여 82년 7월에 "Back On The Chain Gang"을 발표해 미국차트 5위를 기록한다. 이곡은 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King Of Comedy》에 삽입되기도 한다. 82년 여름 크리시, 마틴, 매니저 데이브 힐은 Pretenders에 맞는 새로운 뮤지션을 찾기 시작한다. (피트 판든을 회상해 볼때 새로운 라인업 결성은 어찌보면 잘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피트가 멤버로 남아 있었다면 83년 4월에 사망한 사건이 그들에게 또 한번의 시련으로 남을뻔 했다.) 새로운 멤버로 처음 들어온 로비 맥킨토시는 베이스 주자로 친구인 Malcom Foster를 소개했는데 그와는 전에 Foster Brothers라는 밴드에서 말콤의 형과 함께 활동했다.

크리시는 허니문 스코트 사건과 함께 첫아이의 출산으로 밴드의 활동 중단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83년 Kinks레이 데이비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키우면서도 크리시는 한번도 밴드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당시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밴드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얘기가 떠도는지도 몰랐으며 Pretenders에는 아직도 마틴과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짐이 죽은 뒤로 밴드 내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만일 피트가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돌아왔다면 보다 커다란 문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을 해야 했고 피트를 방출하기로 했던 것이다. 짐의 죽음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라'식의 방법론을 택한 것은 아니다."

"멤버문제가 잠잠해진 후 임신으로 인해 심신이 피곤해 있었다. 누군가를 해고해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문제로 다가올지 몰랐다.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로비의 말을 받아들여 끊임없는 휴식에 들어갔으며 얼마후 새로운 기분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83년 겨울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한 밴드는 84년 초에 앨범을 발표하는데 대부분의 기간을 리허설에 소비했으며 겨울내내 앨범작업에 전력투구했다. 앨범 작업 당시의 상황을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밝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작업하는지 몰랐지만 우리는 조직적이고 정확하게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배킹 트랙(대개 리듬파트의 연주가 담겨 있다.)의 녹음을 위해 5, 6번씩 반복해서 연주했다. 녹음이 끝난 테입을 자리에 앉아 들어본 후 마음에 드는 연주를 찾아내곤 했는데 대개 4번째에서 6번째 사이에 괜찮은 드럼 필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곧 편집을 했고 다음에는 기타 솔로를 집어 넣고 편집하는 식으로 진행해 완성해 나갔다. 보컬을 제외한 모든 트랙이 완성되면 나는 그위에 보컬을 입히기만 하면 되었다.
베이스 트랙이 모두 완성된 후나 작업중에 틈틈히 보컬트랙을 녹음하는 식으로 진행했으며 모든 멤버가 한눈팔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볼두했다. '내가 맡은 베이스 파트가 끝났으니 다음주에 봅시다.'란 말은 우리에게선 볼 수 없었다. 어느 누가 잘못된 점을 지시하면 다같이 들어보고 고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멤버들 모두 납득할 만한 수준의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작곡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기초적인 코드와 가사로 진행한다. 그런 다은 조금씩 조금씩 고쳐 나간다. 베이스가 'buh duh dum don'으로 나가면 드럼이 'dah duh dah duh dah duh dah'로 따라가고 뒤이어 베이스가 다시 'duh duh dump duh duh dum ding ding'하고 울리고 뒤이어 기타가 'dah duh duh day'하고 또 한번 베이스가 'dunt dunt dunt'하는 식으로 연주하는 자체를 즐겼으며 나는 미치광이처럼 모든 파트에 따라 노래부르기 시작하곤 했다."

84년말에 새로운 앨범에서 "Middle Of The Road"가 첫 싱글로 발표되었다. 85년에 1월에는 앨범《Learning To Crawl》을 Sire레코드에서 내놓게 되는데 곧 플래티넘을 획득했다. 앨범 타이틀은 크리시가 자신의 딸이 새 멤버와 함께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4월에 크리시는 둘째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Simple Minds의 Jim Kerr였다.) Pretenders는 곧 월드투어를 시작했으며 관중들의 환호를 통해 예전의 개성적인 사운드를 확인했다. Pretenders는 네번째 정규앨범《Get Close》를 86년 말에 발표하였고 싱글 "Don't Get Me Wrong"을 Top 10에 올려놓았다.
당시 크리시는 빠른 속도로 변모해 가는 음악계에 대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딸들을 위해서라도 록 음악계에서 생존해야 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지미나 피트처럼 자기 자신을 죽이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둘울 잃었다. 두사람 모두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 이었다. 이후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이 존재하는 한 걱정할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렇지만 자신을 암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항상 신경쓰는 정도는 했다.
약물따위를 과다복용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 든다면 차라리 집에 가서 잠을 자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87년 Pretenders는 79년에서 86년까지 싱글들을 모아 만든《The Singles》를 발표했고, 90년에《Packed!》를 94년에《Last Of The Independents》를 발표했다.

출처 <핫뮤직>

조이라이더 (2004-12-05 23:02:16)
최고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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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8 17:46 2007/05/0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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