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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0 Punk77 THE TROGGS
  2. 2008/12/20 Punk77 T-Rex
  3. 2008/02/12 Punk77 VIC GODDARD
  4. 2008/02/12 Punk77 VELVET UNDERGROUND (2)
  5. 2008/02/12 Punk77 TEN POLE TUDOR
  6. 2007/05/10 Punk77 TAV FALCO
  7. 2007/05/10 Punk77 X RAY SPEX
  8. 2007/05/08 Punk77 TOM ROBINSON BAND
  9. 2007/05/07 Punk77 UNDERTONES
  10. 2007/05/04 Punk77 TELEVISION
1964년 결성되어 펑크의 원형들을 보여준 밴드로 1966년 그런지한 기타 코드와 오카리나(ocarina) 솔로가 있는 “Wild Thing”으로 차트의 정상을 기록했다. 이 곡은 지미 헨드릭스가 1967년 몬트레이 페스티발에서 사이키델릭으로 개조한 것도 아주 유명하다.
주로 파워 팝과 발라드를 불렀는데 1968년에는 당시 히피들의 플라워 파워 운동을 찬양한 “Love Is All Around”로 5위로 올라섰는데 이는 R.E.M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이들은 영국에서보다는 미국에서 인기가 더 있었다. 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밴드는 아니었는데 고딕 발라드인 “Cousin Jane”이나 사이키델릭 음악인 “Maybe the Madman”을 들어보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그들은 정력적으로 라이브를 진행하였는데 펑크와 뉴 웨이브의 전성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Ramones와 초기 MC5가 끼친 영향력과 맞먹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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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0 20:11 2008/12/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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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결성되어 여러 멤버들이 있기는 했지만 마크 볼란의 밴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카리스마는 밴드 내 여러 구성원들을 압도했다. 초기에는 영국의 포크 락 듀오인 티라노사우러스 렉스로 시작해서 락 쪽으로 사운드를 강화해 가고 화려한 치장 등으로 데이빗 보위와 함께 글램 락이라는 씬을 만들어 나갔다.

미국에서는 “Get it on” 한 곡의 히트밖에는 없었지만 영국에서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어 자신의 TV 쇼를 진행하는 위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1977년 글로리아가 운전하던 차의 사고로 죽고 밴드는 1978년 해산하였다. 그의 음악은 소비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돌이켜 보면 현재도 그의 영향력은 놀라울 정도다. 하드 락이나 메탈 벤드들은 밴드의 이미지와 강하게 지속되는 기타 음을 가져왔고, 펑크 밴드들은 하이힐이나 깃털 옷 등은 버렸지만 그의 3코드 주의와 팝 미학은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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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0 20:09 2008/12/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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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way Sect의 리더로 Sex Pistols의 공연에 항상 온 그에게 말콤 맥라렌이 밴드를 만들 것을 제안해 Subway Sect를 1976년 결성하고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전설적인 100 클럽의 펑크 페스티발에 참가하고 1977년 클래쉬의 White Riot 투어에 참가한 뒤, 클래쉬의 매니저인 버니 로즈의 도움으로 첫 음반을 제작하는데, 버니 로즈는 녹음 중 고다르를 제외한 모든 멤버를 해고시켜 버린다. 이후 새로이 밴드를 구성해 활동하던 그는 소울 음악을 그의 음악 내로 점점 수용하였고, 1982년 <Songs for Sale> 음반에서는 그의 영웅인 콜 포터를 추종한 카바레 스타일의 팝 음악을 선보였다.
이후 멤버들은 그를 떠나서 Jo-Boxer를 결성하고 몇 곡의 히트곡들을 내었다, 이후 고다르는 재즈 뮤지션들과 <T.R.O.U.B.L.E>을 만들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녹음 완료해인 1984년에는 내지 못하고 2년이나 지나 발매한다. 이후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우편 배달부 일을 하다가 1990년에야 에드윈 콜린스의 프로듀서로 <End of the Surrey People>을 내면서 음악 활동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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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2 12:09 2008/02/1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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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싸구려 도색잡지의 이름을 따 결성된 밴드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카페 비자레에서 20세기 팝아트의 대가인 앤디 워홀과 만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밴드는 앤디 워홀의 쇼인 <Exploding Plastic Inevitable>에 동행하면서 채찍질로 공연을 난장판을 만들었다. 워홀은 Nico를 밴드의 여성 보컬리스트이자 퍼커션 주자로 넣어 유명한 바나나 그림이 있는 첫 음반 <Velvet Underground & Nico>를 1966년에 프로듀서 해주었다.

밴드의 싱어이자 기타리스트인 루 리드와 워홀은 사제지간이 아니라 동성 연인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루 리드는 “I'm Waiting For The Man”에서는 헤로인을, “Run, Run, Run”에서는 코카인을, “Venus in Furs”에서는 피학성 음란증을 다루어 대부분의 곡들은 방송 금지가 되었다. 1973년 해산했지만 이들의 활동 시절 겨우 몇 백장만 나간 그들의 음반들이 1980년대 들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대중들보다는 뮤지션들이, 그들이 받은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재조명된 것이다. 이후 재결성 움직임들이 있었지만 1995년 스터링 모리슨의 병사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공연 이후, 이들의 재결성은 완전히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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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2 12:07 2008/02/1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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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unxless 2008/02/14 19:42

    I'm Waiting For The Man 아닌가요?
    26달러쥐고 마약상 기다리면서 똥줄타는 심정 표현했다는...
    비키니킬에 대한 글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한참 웃었습니다.

  2. Punk77 2008/02/15 09:11

    헉 맞네요..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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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튜더가 결성한 펑크 밴드로 <The Great Rock ’n’ Roll Swindle>에서 “Who Killed Bombi”를 불렀다. 밴드의 리더인 에디 튜더는 Sex Pistols가 해산할 무렵 Johnny Rotten의 대타로 기용될 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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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2 11:59 2008/02/1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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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www.kinglybooks.com

미국출신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Tav Falco와 그의 밴드 Panther Burns는 1981년 Behind The Magnolia Curtain라는 밴드에서 엘비스 프레슬리풍의 곡을 연주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Alex Chilton(전 Box Tops, Big Star)의 지원아래 밴드는 곧바로《Blow Your Top!》과 전설적인 Sun 스튜디오(엘비스 프레슬리의 레이블로 유명한..) 에서 녹음한《Sugar Ditch Revisited》등 두장의 Ep를 발표하면서 소수의 컬트팬들을 거느리기 시작한다.

Tav Falco는 Sun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면서 Dixie Flyers의 피아니스트인 James Luther Dickenson과 친해지게 되고 그의 밴드 Panther Burns의 레코딩에 James를 자주 초청해 같이 녹음하기도 한다. 이후 Falco는 자신의 레이블을 만들어 1984년 테네시주의 멤피스에서 공연한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기도 하고, 1986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그 본거지를 둔 New Rose Records와 접촉해 Alex Chilton이 프로듀스한《The World We Knew》를 발표하는데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초창기 Sun 레코드 스타일의 로커빌리, R&B, 델타블루스 스타일이었다.

Jerry Lee Lewis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Great Balls Of Fire(데니스 퀘이드, 위노나 라이드 주연) 에도 잠깐 출연했던 Tav Falco는 이후 자신의 10주년 기념 라이브앨범인《Midnight In Memphis》를 발표하는데 여기에는 Chilton 그리고 Dickenson이 "Goldfinger", "Train Kept A-Rollin'"등 두곡에 참여하기도 한다.

1990년에는《Return Of The Blue Panther》라는 앨범으로 'Rock Me Baby' , 'Got Love If You Want It'등의 리듬앤블루스의 고전들을 연주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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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23:54 2007/05/1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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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의 펑크원년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이다.

보컬리스트인 Poly Styrene은 독특한 패션감각과 치열교정기를 트레이드 마크로 곧 런던펑크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핀란드 펑크의 대모로 불리우며 후에 Glyn Johns로 바뀌는 색소폰연주자 Lora Logic, Jak Stafford(guitar), Paul Dean(bass)(후에 Loverboy의 멤버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인 듯 하다.), B.P.Hurding(drums)의 멤버들로 처음 결성된 밴드는  1977년 라이브 활동을 시작한 후《Live At The Roxy WC2》라는 비공식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다.

독특한 분위기의 곡들인 "Germfree Adolescent", "Oh Bondage Up Yours", "The Day The World Turned Dayglo", "Identity"등의 싱글들은 펑크의 에너지로 충만할뿐 아니라, 직설적이지만 진지한 언어로 70년대 후반 도시 젊은이들의 천편일률적인 패션감각을 비난하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가질것을 권유했다. 항상 팝스타에 대한 혐오감을 유지하고 있던 Poly는 1979년에 그룹을 해산하고 Krishna Consciousness Movement에 참여한다.

해산 후에 발표된 마지막 싱글인 "Highly Inflammable/Warrior In Woolworths"에서도 Poly의 초기모습을 여전했다. Poly는 솔로로 독립해 1980년《Translucence》와 85년 Ep《Gods And Goddess》를 발표하지만 더이상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김동인 (2003-11-20 23:22:53)
노래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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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14:44 2007/05/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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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일 영국 캠브리지에서 태어난 Tom Robinson은 오보에와 클라리넷, 베이스 기타 등을 배우며, 다양한 체험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켄트에 있는 재활센터인 Finchden Manor에서 휴양하고 있는 동안 기타리스트 Danny Kurstow를 만나 1971년, 첫번째 그룹인 Davanq를 만든다. 2년후 Hereward Kent, Ray Doyle과 함께 Cafe Society라는 밴드로 Kinks의 레이블인 Konk와 계약한다.

1974년에는 Ray Davies와 Mick Avory의 도움으로 레코딩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번째 앨범 녹음 도중 경영진과의 불화가 표면화되며 Tom Robinson은 무대위에서 Ray Davies를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곤 한다. 후에 Kinks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7년 b-side곡인 "Prince Of Punks"라는 곡을 발표한다.

밴드가 EMI와 계약하게 되자 Konk는 Tom Robinson의 13곡의 작품에 대해 발매를 보류한다. 그리고 그중 몇곡은 TRB(Tom Robinson Band)의 첫번째 앨범《Power In The Darkness》에 수록되었고, 그중 "2468 Motorway"가 UK Top40 히트를 기록한다. Tom Robinson은 키보디스트인 Mark Ambler, 드러머 'Dolphin' Taylor, 그리고 절친한 기타리스트 Kurstow와 함께 동성애를 옹호하는 가사를 담은 음악들을 계속 발표했고. 파격적인 행동들은 가사들과 함께 팬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Summer Of 79"와 같이 진지한 곡들도 있었는가 하면, "Up Against The Wall"과 같이 부드러운 유머와 함께 이전의 격한 감정들을 자제한 곡들이 공존했다.
《Rising Free》Ep 에는 동성애자들의 찬가인 "Glad To Be Gay"가 수록되어 있었고, 밴드의 사회참여적인 행동들은 1978년 북아일랜드 게이의 권리(Nothern Ireland Gay Rights)와 이혼한 부모의 가족들의 협회(One Parent Families Association)를 위한 자선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그 정점에 도달한다. Tom Robinson은 1979년에 워싱턴에서 열린 레즈비언과 게이의 권리를 향한 행진(Lesbian and Gay Rights)에 참여했으며 후에는 밴드 전체가 잠시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주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활동에 치중하며 음악 활동이 시들해지자 언론의 비판을 받게 되고 소매상들은《TRB2》(Todd Rundgren이 수퍼바이저로 참여.)의 판매를 거부하기도 한다.

Kurstow가 전 Sex Pistols의 멤버인 Glen Matlock의 그룹인 Spectres에 가담하고 있는 동안 Robinson은 잠시 Section27이란 밴드를 이끌며 Elton John, Peter Gabriel등과 함께 곡을 쓰기도 한다. 1981년 베를린으로 본거지를 올긴 Robinson은 솔로앨범《North By Northwest>를 녹음하고 캬바레나 지방 극장들에 출연하며 많은 돈을 벌기도 한다. 1982년에는 "Warbaby"와 "Atmospherics"가 UK Top40을 기록하고, 앨범《Hope And Glory》에서 Steely Dan의 "Ricki Don't Lose That Number"를 커버해 원작 이상으로 큰 히트를 거둔다.

새 앨범《Still Loving You》에 만족한 Robinson은 그룹을 재결성하기로 결심했고 이런 약속은 베를린에서의 공연을 수록한《Last Tango》에서 옛 히트곡들과 함께 나타난다. Robinson 특유의 명료한 웅변조의 곡들은 이후의 작품들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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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8 14:24 2007/05/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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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의 Londonderry에서 결성된 pop/punk밴드 Undertones는 Feargal Sharkey(vocals), John O'Neili(guitar), Damian O'Neill(guitar), Michael Bradley(bass), Billy Doherty(drums)의 멤버들로 결성되었다.

1978년 벨파스트의 레이블 Good Vibrations과 계약을 맺고 BBC의 디스크 자키인 John Peel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첫 싱글 "Teenage Kickout"을 발표한다. John Peel은 이곡을 듣자마자 감동받아 자신의 all-time favorite에 포함시켰다고도 한다.
1979년 봄, "Jimmy Jimmy"로 처음 Top 20에 진입한 Undertones는 데뷔앨범이 비평가들로부터 이 시대 최고의 팝 음반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0대들의 불안한 심리상태와 사랑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주된 팬들인 젊은층에게 자신들이 60년대 초중반 팝음악에 영향받았음을 공공연히 시인했다. 《Hypnotised》앨범 역시 좋은 반응을 얻는데 멜로딕한 히트싱글 "My Perfect Cousin"과 "Wednesday Week"이 수록되어 있다.
"My Perfect Cousin"에서는 His mother brought him a synthesizer/she got the Human League into adviser her'라고 노래하며,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신디사이저 팝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보컬리스트 피어걸샤키는 후에 솔로로 독립해 신디사이저팝 음반을 냈다.)

이후 대규모 미국투어가 이어졌고, 1981년에는’《Positive Touch》가 완성된다. 강렬한 곡인 "It's Going To Happen"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로맨틱한 곡인 "Julie Ocean"같은 곡은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 한편 비평가들은 Undertones의 음악이 더욱 다양한 요소들을 받아들여 성숙해지길 바랬는데, 이런 주위의 요구들을 수용해 "The Love Parade"가 수록된 다음앨범《The Sin Of Pride》에서는 브라스 섹션을 추가하기도 했으나, 가사의 표현이 물렁해지기 시작했다.

Undertones의 제한된 음악적 영역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멤버들은 1983년 6월 그룹을 해산한다. 보컬리스트 Sharkey는 Vince Clarke와 함께 Assembly라는 밴드로 잠시 활동한 후 솔로로 전향해 또다른 성공을 거둔다. O'Neil 형제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얻은 밴드 That Petrol Emotion을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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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7 09:59 2007/05/0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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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Verlaine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음악인으로서 70/80년대 영국과 미국의 로큰롤 음악의 방향 제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형 히트곡 배출이나 대규모 공연장의 성공적인 콘서트같이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지만 Verlaine이 만들고 녹음한 음악들은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하던 펑크/뉴웨이브 운동울 일깨웠다.

80년대에 관심을 얻었던 영국과 미국의 음악을 보면 Tom Verlaine의 초기 작품들의 영향과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부터 Tom Verlaine이 대중적인 성공을 꺼린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왕성한 창작열은 타협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1984년 9월 8일자 영국의 Sound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은 명성에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소속 레코드 회사가 좀 더 지원에 신경을 써준다면 굳이 이를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이름을 알리게 되는 거라면 관심을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홍보만 제대로 이루어 졌더라면 내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도 보다 많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이끄는 Television은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내긴 했지만) 그런데 나는 홍보지원이라는 것을 받아본적이 없다. (1982년) Virgin 레코드사는《Words From The Front》앨범의 홍보지원을 약간 해주긴 했지만 이는 런던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게다가 레코드사 사람들은 팝계에 신디사이저 붐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이 마당에 (신디사이저 연주는 싣지 않고) 기타연주만 담고 있으니 히트할 생각은 아예 포기한것 아니냐며 내게 불평을 해댔다."

그는 어릴때 팝 음악이라든가 기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모손에 이끌려 일곱살때 클래식 피아노 레슨을 받기는 햇지만 심포니 연주를 들으며 꿈나라로 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좀더 큰 뒤에는 모던 재즈에 흥미를 느껴 색스폰으로 모던 재즈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로큰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막 십대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그가 처음 관심을 가진 곡은 Rolling Stones의 "19th Nervous Breakdown"이었는데 당시는 곡의 음보다도 가사에 더 흥미를 느꼈다. 청소년 시절 그는 내성적인 성격에 수줍음을 잘 탔으며, 연약한 체구에 공부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눈에 안띄는 지극히 얌전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나온 1968년 8월 Verlaine은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 북부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지닌 십대 청소년들과 문학, 기존 인습에서 벗어난 생활방식,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팝 음악 같은 것에 막연한 흥미를 느끼는 젊은 청년들을 알게 되었다. Verlaine은 스트랜드 서점의 점원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틈만 나면 시를 쓰고 친구들과 연주를 하곤 했다.
1971년 그는 두명의 친구를 끌어들여 Neon Boys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Verlaine은 기타와 보컬을 Richard Hell이 베이스와 보컬, Billy Ficca가 드럼을 연주했다. Billy Ficca는 Verlaine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1967년부터 함께 연주를 해온 사이였다. Neon Boys는 얼마못가 해체되고 Ficca는 보스톤으로 가서 한동안 블루스 밴드를 전전한다. 밴드 해체뒤 Verlaine은 기타연주와 작곡에 더운 몰두하며 뉴욕에서 솔로로 활동하면서 동네 극장이나 친구의 아파트에서 기타를 연주하곤 했다. 1973년 10월 Verlaine은 자신의 공연장을 찾던 Lichard Lloyd라는 젊은 뮤지션과 합치게 된다.

"Tom이 하는 연주를 들어보니 그가 정확한 연주를 한다는게 바로 간파되었다. Tom이 지닌 이같은 재질을 내가 더 크게 키워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Ficca도 보스톤에서 돌아와 세 사람은 새로운 밴드를 만들었는데 멤버들은 밴드 이름을 어떻게 붙일까를 한동안 고심한 끝에 Television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Lloyd가 들려주는 밴드명 채택 배경은 이러하다.

"우리가 텔레비젼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이유는 미국내 모든 가정에 다 있는 존재가 바로 텔레비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집에나 다들 있을 정도로 흔하기 때문에 있는듯 없는듯 느껴지는 존재가 바로 텔레비젼 아닌가."

Television은 1974년 3월 2일 뉴욕의 타운 하우스 극장에서 데뷰 무대를 가졌다. 그 직후 Verlaine은 Bowery 중심부에 위치한 록 클럽인 CBGB의 주인을 설득하여 일요일밤에 정기적으로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벌이는 인상적인 공연과 멤버들이 지닌 재능에 대한 명성은 삽시간에 주위로 퍼져 나갔다. 여류 시인이자 록 스타인 Patti Smith

"Tom의 기타연주는 수천마리의 파랑새가 지저귀는 것 같다."

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1974년 Patti Smith는 "Hey Joe"라는 싱글을 발표하면서 Verlaine에게 백 보컬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1975년에는 베이스 연주자인 Fred Smith를 끌어들여 5인조로 늘어났다. Blondie에서 활동하다가 올겨온 그는 Verlaine의 밴드를 처음 봤을때 팬이 되어 버린 인물이다.그는 Television이 지닌 도전정신을 좋아했다.

"어떤 밴드들은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주머니에 양손 찔러 넣고 마냥 한가하지만 Verlaine은 베이스 연주자조차 멜로딕하길 원했기 때문에 뜻밖의 위치에 음표들을 배치해야 했다."

고 그는 뒷날 회고한 바 있다.
밴드는 자비를 들여 "Little Johnny Jewel"이라는 싱글(8월 19일 Ork 레코드사 발매)을 발표한 뒤 레코드 회사 관계자자들의 관심을 얻어내고자 데모테입과 그간 활동지역 비평가들로부터 들었던 호의적인 비평문을 동봉하여 레코드 회사에 돌렸다. 1976년 초 Elektra레코드사 가 이들에게 다소의 관심을 보이는 듯 하더니 7월에 이들과 정식으로 레코딩 계약을 체결했다. 다음해 2월 Television의 데뷰앨범《Marquee Moon》이 나왔다. 이 앨범은 70년대 중반 나온 데뷔앨범들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이자, 70년대 최고 수작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밴드는 자국인 미국에서도 상당한 지지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영국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햇다. 1977년 초 피터 가브리엘의 미국공연 오프닝을 마친 이들은 5월에 영국으로 건너가, 스탠딩 룸 전용 공연장에서 공연을 치르며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앨범 역시 영국에서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며 연말에는《Marquee Moon》앨범이 Sound지에 의해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엇으며 Melody Maker지 선정 가장 촉망받는 외국 신인으로 인정받았다. 1978년 초에는 후속앨범으로《Adventure》가 나왔는데 Verlaine은 Richard Lloyd와 공동작곡한 "Days"를 제외한 전 수록곡을 작사, 작곡했다. 새앨범 역시 데뷔앨범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보다 영국에서 더 큰 반향을 얻어냈다. 앨범은 발매 일주일만에 U.K.chart top10에 진입했다.

이들의 앞길은 이렇듯 장미빛으로 비쳐졌지만 밴드의 내 외부적 상황은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번째 앨범의 제작계획이 세워지기도 전에 해체를 맞이했고, Verlaine은 솔로활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의 첫 독집앨범《Tom Verlaine》(1979년 Elektra)은 그가 혼자서도 활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음을 입증시켰다. 그가 들려준 정열적이고 직선적인 기타연주는 닐 영(Neil Young)이나 그레이트풀 데드(Greatful Dead)의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 같은 명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비견될 수준이었다.《Tom Verlaine>은 대다수의 비평가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얻었으며 이러한 호의적인 평가는 후속앨범 《Dreamtime>(1981년 Warner Brothers)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 앨앨범을 홍보하기 위한 공연을 갖지 않았고 레코드사의 홍보활동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두장의 앨범은 상업적 히트는 거두지 못했다. 82년에는《Words From The Front》를, 84년 가을에는《Cover》를 내놓았는데 미국에서는 Warner Bros를 통하여, 영국에서는 Virgin을 통해 나왔다. 이 앨범들 역시 미국과 영국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얻었는데《Cover》의 경우는《Marquee Moon》에 비견되었다.
앨런 존스라는 평론가는 이 앨범에 대해 멜로디 메이커지 1984년 9월 1일자에서 '뛰어난 편곡과 예리한 감성에서 배어나온 흡입력 있는 정열에 깊이 매혹당했음을 미쳐 인식하기에 앞서 빼어난 작품들은 듣는이를 끌어당긴다. 이 앨범에는 솔직함이 있다. 개방성과 대담성이 매력적이고도 감동적으로 표현됐다.'라고 평했다.

한번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의 기자가 솔로 작품에 대해 그와 인터뷰를 가지며 자기성찰력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이 그렇다. 당신은 혹시 콜트레인의 영화 작품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이 만든 영화는 뒤로 물러선다던가 승부를 겨룬다던가 하는 법 없이 지극히 내부적 상황에 치중한다. 모든 총체적인 감정은 점점 더 본질적으로 되어간다."

"나는 항상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이들을 존경한다. 밥 딜런의 초기 앨범에 담긴 다소 서툴게 느껴지는 포크 기타 연주 또한 좋아한다. 그의 기타연주가 서툴게 들리는 것은 연주실력이 엉터리여서가 아니고 단순한 동시에 난해하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번씩 내가 연주했던 지난 앨범들을 다시 듣곤 하는데 예전 앨범들을 다시 들을 때면 성적인 전율이 느껴진다. 리듬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성에 대한 공상에 빠지게 만든다. 기타에는 어떠한 쾌락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것 같다. 멜로디 말고 기타연주를 신경써서 들으면 긴장감이 풀어진다."

그는 영국에 자주 체류했는데 위의 인터뷰를 가진 1984년 당시에도 그는 영국에 있었다. 그는 잦은 영국 체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뉴욕은 이제 일하기에 적당치 못해서 거주지를 유럽으로 옮길까 생각중이다.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것은 미국에서는 열광적인 기운이 존재하는데 유럽에서는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그러한 것이 이미 생명을 다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국같은 경우는 황실제도의 존재가 그러한 것들을 매장시켜 버린것 같다. 지중해인들은 어떤지 알아보아야겠다. 모든것에서 손을 털고 시골에 파묻혀 사는 생활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1987년 영국의 레이블인 Fontana에서 다음앨범인《Flash Light》가 나올 당시 그는 영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앨범은 Television이 전성기에 발표했던 앨범들과 막바로 비교가 됐는데 그의 기타연주는 초기 솔로앨범들보다 한층 인상적이고 힘이 있었다. 90년에는《Kaleidsocopin'》을 발표했다. 91년 11월 그는 Television의 옛 동료 Lloyd, Smith, Ficca와 오랜만에 모여 잠시 앨범작업을 같이 하고 92년 글래스튼베리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다. 이와는 별도로 같은 해 초 Verlaine은《Warm And Cool》이라는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출처  <핫뮤직>

도일만 (2004-08-06 05:52:54)
굳이 찾아들을 필요없는 밴드..

television (2004-08-17 17:05:59)
난 좋은데 띠리디리딧.

조이라이더 (2004-12-05 23:08:47)
어이가 없다 반드시 찾아들어야 할밴드 marquee moon엘범

검은깃발 (2005-01-10 18:12:58)
꼭 들어야 하는 밴드 텔레비젼. marquee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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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4 17:27 2007/05/0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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